3화 뱀 대가리
철류흔이 무심한 얼굴로 묻기를.
“왜, 정신 나간 소리 같나?”
그러자 협무극은 난감한 표정이 되어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저…… 그게…… 탈태환골이라 함은 어떤 은유적인 표현이신 건지, 아니면…….”
“말 그대로 육신을 완전히 개조하겠단 뜻이지.”
“…….”
협무극은 재차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그러시구나.
진정 그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구나.
당혹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탈태환골이 무슨 뉘 집 개 이름인가.
그것은 일반적인 공부와 질적으로 다른 최상승 수준의 깨달음인데, 도대체 무슨 수로 열흘 만에 성취한다는 건지…….
십 일이 아니라 십 년이라 해도 이루기 어렵다.
당대에 내로라하는 강자들의 소싯적 재능이라면 모를까, 그간 쭉 지켜봐 온 철류흔의 자질로써는 절대 무리다.
‘허, 어찌 저러시는 거지? 당장 본 문에 기적을 이뤄 줄 절세의 영약이 있는 것도 아니거늘.’
속으로 중얼거리는 협무극의 얼굴에 근심의 골이 깊게 팼다.
하지만 철류흔의 태도는 점입가경이었다.
“탈태환골 한 번조차 못 하면 무인도 아니지.”
“…….”
협무극은 순간 말문을 잃었다.
아이고, 그렇구나.
나는 지금껏 무인이 아니었구나.
심지어 앞으로 탈태환골을 성취할 가능성마저 거의 없으니 무인이 되긴 글렀구나.
왠지 그렇게 탄식하는 듯한 눈빛이다.
‘독환이 모종의 악영향을 끼친 게 확실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미간을 좁힌 협무극은 진심으로 철류흔의 머릿속이 염려스러웠다.
언행이 이전과 사뭇 다른 건 그럴 수 있다.
이해한다.
그런데.
가히 천우신조의 기연이나 마찬가지인 탈태환골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는 것은 결코 정상적이라 할 수 없잖은가.
하나 철류흔으로 환생한 신검의 입장은 다르다.
실제로 그는 지난 일천 년 동안 탈태환골을 완벽하게 깨달은 소유자를 수도 없이 봐 왔다.
그중 일부는 한 번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두어 번 이상 성취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련의 요체를 자연스레 알게 된 그로선 탈태환골이 곧 무의 출발점이자 기준점이며, 또 단시간에 절륜한 강자로 성장하기 위한 최선의 길인 셈이다.
의문의 낭인을 목표로 한다면, 그 정도는 기본적으로 이뤄야 마땅하리라.
그때 협무극이 정중한 자세로 일렀다.
“소문주님, 송구합니다. 무의식중에 내기를 쌓으신 건 운이 따랐다고 해도, 솔직히 탈태환골은…….”
“회의적이다?”
“…….”
침묵 속에 긍정이 담겼다.
철류흔이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말했다.
“하기야 협 총감이 듣기엔 허무맹랑한 소리일 테지.”
“일단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내 머리는 멀쩡해.”
“저, 그런 뜻이 아니오라…….”
“알아, 그런 뜻인 거.”
“…….”
속내를 들킨 협무극이 민망한 기색을 보였지만 철류흔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탈태환골은 결코 쉬운 성취가 아니지. 하지만 은밀한 안배가 마련되어 있다면?”
그 말에 협무극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실은 탈태환골을 가능케 할 비밀 장소를 알고 있다.”
“……!”
협무극으로선 전혀 예상도 못 한 전개다.
“그, 그것이 사실입니까!”
“아무렴.”
짤막하게 답하는 철류흔의 눈빛은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협무극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진심이시구나!’
문득 사공운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생전의 그도 확신에 찬 발언을 할 때면 늘 저런 눈빛을 지어 보이곤 했다.
불현듯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한 생각.
‘가만!’
동공을 반뜩인 그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혹시 문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까?”
그러자 철류흔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눈치 빨라서 좋군.”
“아……!”
“과거 사부님이 우연히 검을 얻으신 장소, 바로 거기에 예의 안배가 존재한다.”
“세상에…… 저는 까맣게 몰랐습니다.”
“그야 철저히 비밀에 부쳤으니까. 문중을 통틀어 오직 나만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지.”
협무극은 거듭 감탄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과연…… 정황으로 보아 문주님께선 차후 백악검문을 이끌어 나갈 인재는 오직 그뿐이라고 일찌감치 확신하신 게 분명하다! 어쩌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큰 잠재력을 보유한 건가?’
사공운은 필시 철류흔에게서 어떤 성장 가능성을 엿봤고, 그렇기에 탈태환골이 가능하다는 비밀의 안배가 있음을 알고도 그냥 가만히 놔두었던 것이리라.
맞다, 십중팔구다.
만약 그러한 이유가 아니라면 진작 손을 대도 댔을 테니까.
협무극은 그렇게 확신하며 궁금증을 표했다.
“소문주님, 그럼 과거에 문주님이 입수하신 검도 원래는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습니까? 애초 특별한 안배가 마련된 곳에 자리해 있던 것이니…….”
“나도 모른다.”
그러자 협무극이 아쉽다는 양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파괴되어 사라진 검이니 그만 잊도록 해.”
철류흔은 앞서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얼버무렸다.
“예…… 참, 그곳은 정확히 어디입니까? 자칫 위험할 수 있으니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사양하지.”
일언지하에 거절한 철류흔이 넌지시 묻기를.
“나를 믿나?”
“물론입니다, 소문주님.”
협무극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나 또한 협 총감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생전의 사부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감개무량한 말씀입니다. 그 마음은 이미 비밀을 토로하신 걸로 충분히 증명되었습니다.”
“좋아, 진정 날 신뢰한다면 그곳에 대해 더는 묻지 말도록 해. 뭐든 결과로 증명해 보일 테니까.”
약관의 청년답지 않은 근엄한 기도에 협무극은 일순 가슴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뭔가 한 단계 성장하신 듯한 기분이다.’
식물인간이 되기 전엔 느낄 수 없었던 장중한 분위기가 일신에 충만했다.
“약속하지. 사부님을 해친 흉수는 반드시 내 손으로 찾아 처단하리라고.”
철류흔의 단호한 음성.
물론 방금 말한 건 백악검문 소문주 입장에서 표면적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이다.
기실 복수심의 본질은 사공운을 위함이 아니라 역사상 최고의 신검으로서 뜻하지 않게 겪은 참패를 설욕하기 위함이었다.
뭐, 아무러면 어떤가.
낭인의 목을 베기만 하면 자신도, 백악검문도 모두 복수를 이루는 셈이니까.
한편 내막을 전혀 모르는 협무극은 그 말에 감복하여 목에 힘을 주고 화답했다.
“예, 소문주님! 앞으로 성심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성심을 다해 차려와 봐.”
“예?”
“요리상.”
“아.”
“배고파 죽을 것 같으니 어서 뛰어.”
“예, 옛!”
그렇게 협무극은 부리나케 문밖으로 사라졌다.
* * *
“으읏…….”
입술 사이로 나지막이 새어 나오는 신음.
을사적은 어두운 창고 안의 한 벽면에 등을 기대고 앉아 희미한 등화에 비친 제 몸을 가만히 살폈다.
정말 한심스러웠다.
피투성이,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꼴이.
부목으로 고정된 한 쌍의 다리를 보고 있으니 절벽 같은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제기랄…… 이제 난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후우…….’
숨을 길게 내쉰 그는 현 상황을 직시하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당장 밖으로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지만 마땅한 방도가 없다.
심각한 골절상도 모자라 전신이 마치 석상처럼 굳어 버린 상태인데 뭘 어떡하겠나.
지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머리뿐인 것을.
이렇듯 몸이 마비된 건 내공을 이용한 점혈법에 주요 마혈을 짚인 영향이었다.
물론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해혈은 되겠지만, 문제는 그 전에 또 누가 와서 기공 점혈을 시전해 몸을 마비시킬 게 분명하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그렇다.
사문의 변절자를 이대로 허술하게 방치할 리는 만무하니까.
설령 자연적으로 해혈이 된다고 한들, 어차피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상황이라 독 안에 든 쥐 신세나 다름없었다.
창졸간 한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문주 사공운이 맨 처음 발탁한 적전제자이자 일찍이 차대 문주 후보로 낙점을 받은 소문주…… 바로 자신의 사형인 철류흔.
‘놈! 여섯 달을 공들였는데, 인제 와서…….’
그 심경을 대변하듯 이마에 굵은 핏줄이 내돋쳤다.
하나 분노도 잠깐.
다시금 침통함에 빠진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의문을 곱씹었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무려 여섯 달을 의식 없이 누워 지내던 철류흔이 갑자기 무슨 수로 독환의 힘을 억누르고 정신을 되찾은 걸까?
축기는 과연 어떻게 행한 것이며, 또 내공을 이용해 전신의 근맥을 일시적으로 강화하는 요체는 언제 터득한 걸까?
덧보태 회복하자마자 인격이 싹 바뀐 듯하던 언행도 의문스럽긴 마찬가지다.
한데 그 순간.
덜컹―
묵직한 음향과 함께 창고 문이 활짝 열리며 어두운 내부로 환한 빛이 깃들고.
저벅저벅.
문턱을 지나치는 발걸음 소리가 나지막이 울린다.
을사적이 힘겹게 머리를 들어 올렸다.
“누구……?”
“누구긴 누구야.”
귓전에 와 닿는 무심한 음성에 을사적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까운 정면.
바닥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채 오롯이 서 있는 인물은 바로 철류흔이었다.
사색이 된 을사적은 황급히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직접 심문하러 왔구나!’
철류흔이 이내 그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말하기를.
“왜, 내가 저승사자 같나?”
동시에 을사적의 안면 근육이 움찔 움직였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저승사자.
말마따나 그랬다.
아니…… 솔직히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운 기분이었다.
앞서 철류흔의 무자비한 구타에 코뼈가 상한 것도 모자라 왼쪽 갈비뼈, 양쪽 정강이뼈까지 무참히 부러져 나가는 끔찍한 아픔을 맛봤으니까 말이다.
“대, 대사형…… 일단 제 말부터 들어…….”
“주둥이 닫아.”
“……!”
“아직 혀 놀릴 때가 아니야.”
을사적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합죽이가 된 양 입을 꾹 다물었다.
철류흔이 무표정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햇수를 새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오래 살다 보면 그 사람됨을 간파하는 안목이 생긴다.”
그 소리에 을사적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미친…… 동갑인 주제에 뭐 얼마나 오래 살았다고.’
누가 들으면 일백 살은 족히 넘은 줄 알겠다.
슥.
철류흔의 오른쪽 발이 상대의 왼쪽 아랫다리에 있는 부목 위로 살며시 얹혔다.
“너처럼 탐욕에 눈이 멀어 교활한 수작이나 부리는 놈은 대저 위기 앞에 비겁해지기 마련이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와지끈―!
부목이 금을 그리며 부서져 나갔고, 겨우 고정해 놓은 정강이뼈가 다시 어긋나고 말았다.
“으악, 으아악! 으아아아악!”
을사적이 괴로운 비명을 내지르는 가운데 철류흔은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이 무심하게 말했다.
“다음은 우측이다.”
“으흑, 으흐윽…… 제, 제발…… 자비를……!”
“자비는 이미 베풀었어. 아직 살려 두었잖아.”
“……!”
“내 눈 똑바로 봐.”
철류흔의 싸늘한 목소리에 을사적은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무미건조한 눈빛.
을사적은 그것을 보자마자 덜컥 겁이 났다.
‘큭, 저 눈빛…… 어쩌면 앞뒤 안 가리고 날 죽일 수도……!’
철류흔이 시선을 고정한 채 경고했다.
“지금부터 잔머리 굴리지 말고 대답해라. 두 번 말 안 한다.”
“예, 예!”
“독환, 누가 줬어?”
“그, 그건…… 제가 욕심에 눈이 멀어 독단적으로…….”
철류흔의 한쪽 발이 이번엔 상대의 우측 부목을 쾅! 찍어 눌렀다.
재차 울려 퍼지는 비명.
을사적은 고통을 못 이겨 얼굴 살을 푸들푸들 떨어 댔다.
‘윽…… 씨발…… 이러다가 진짜 죽으면…….’
그렇듯 공포에 질린 그의 입에서 배후의 실체가 튀어나왔다.
“처, 천사방(千蛇幫)입니다! 천사방! 그 방주가…… 독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백사두검(白蛇頭劍)?”
“예! 그, 그렇습니다! 바로 그입니다!”
천사방의 방주, 백사두검 굴마훈.
간사한 뱀 무리의 우두머리라 불리는 사파 무인이자 호남성 내의 유명 검수.
그때 철류흔이 실망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배후가 고작 뱀 대가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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