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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검 환생록 (윤민호) 판타지 소설 1화

취미 생활(만화책.시간떼우기>

by 이쏘시게 2025. 3. 16.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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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눈을 뜨다

사람이었다.

검(劍)이 되고 싶었다.

결국 소원대로 검이 되었다.

사람이었던 기억을 전부 잃어버린 채.

* * *

나는 ‘신검(神劍)’이다.

정신적 자아를 지닌 데다 경이로운 신기마저 발휘하는 무림 역사상 최고, 최강의 검.

일천 년 전 최초로 자아에 눈을 뜬 이후로 천마(天魔), 검제(劍帝), 사황(邪皇), 무선(武仙), 혈신(血神) 등 각 시대 최강자들 대부분이 나를 소유하며 천하를 제패했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수도 없이 군림의 길을 밟아 왔다.

강호제일검, 천하제일검, 고금제일검…… 온갖 찬사를 지겹도록 들어 왔다.

한데.

카하앙― 쩍……!

어째서.

캉― 쩍, 쩌적……!

지금 내 몸통에 금이 가고 있는 걸까.

카캉― 쩌저적……!

이제껏 그 어떤 보검, 명검도 날 부수지 못했는데.

쩌어어어엉― 콰차하아앙!

후두둑, 후두두둑, 후둑……

파괴되었다.

천하 만병의 지존인 내가 이름 모를 한 낭인이 휘두른 칼 앞에.

조각조각, 처참하게.

써걱! 툭―

소유자의 머리가…… 잘려 나가는 소리…… 내 의식도…… 빠르게…… 꺼져 가고 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신검이라더니 별것 아니구나.”

환청처럼 들리는 놈의 음성.

사방이…… 어둡다.

그래, 이것이…… 죽음이란 건가.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저편으로 멀어지는 가운데 신검의 정신적 자아는 깊고 깊은 암흑 속으로 빠져들 듯 조용히 소멸했다.

* * *

무림에 하나의 소식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건 바로 정파 백악검문(白嶽劍門)의 문주 백문검군자(白門劍君子) 사공운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생전의 그는 호남성 내의 유명 검수들 중 한 명이었기에, 뭇사람은 그 흉수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하지만.

죽은 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괜히 이런저런 소문만 떠돌며 억측을 낳았다.

백악검문 무인들은 비통함을 감출 수 없었다.

과거 정파 명문이었다가 몰락해 버린 사문의 부흥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문주 사공운, 그의 죽음과 더불어 앞날에 대한 희망도 잃고 말았으니까.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장례를 치르던 중.

설상가상 사공운이 살아 있을 때 가장 아끼던 첫째 제자마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식물인간이 됐다.

병상에 드러누운 그는 이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문중의 기류는 더욱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여섯 달이 흘렀다.

* * *

‘음…….’

몸이 천근만근이다.

물에 흠뻑 젖은 종이인 양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신검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의식을 찾았다.

낯선 낭인의 손속 앞에 무참히 깨져 소멸했던 자신이…….

게다가.

마치 무기력한 병자처럼 푹신한 침상 위에 가만히 눈 감고 누워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슥―

별안간 미약한 음향과 함께 와 닿는 따뜻한 감촉.

손목 쪽이다.

누군가 맥을 짚고 있다.

‘맥을 짚어?’

의아심이 들었다.

사람처럼 손목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러한 감각을 인지하는 걸까?

신검은 곧 흠칫했다.

손목만이 아니라 머리, 가슴, 배, 다리…… 그 일련의 생소한 감각이 전부 깨어나 선명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들숨과 날숨까지.

그렇다.

십중팔구 인간의 육신이었다.

즉 자신의 정신적 자아가 지금 어떤 사람의 몸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대사형.”

맥을 짚던 자가 말했다.

‘대사형?’

신검이 의문을 품은 찰나 골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윽……!’

일시에 너무 많은 상념이 머릿속으로 침범했다.

불가해한 현상이다.

현재 제 것이 아닌 기억이 강제로 주입되고 있잖은가.

‘철…… 류흔?’

맞다, 이는 철류흔의 기억이다.

낭인의 손속 앞에 허무히 절명한 소유자의 첫 번째 제자인 스무 살 청년.

확신했다.

철류흔의 육신이 분명하다고.

지금 뇌리를 맴도는 온갖 상념이 예의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 주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소유자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던 자신이 후기지수 철류흔의 육신을 통해 깨어나다니.

“맥박은 정상입니다. 제 말이 들리시려나 모르겠지만.”

저 목소리…… 알겠다.

철류흔의 사제인 동갑내기 청년 을사적이다.

그때.

지끈거리던 두통이 씻은 듯 가라앉았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후우.’

그런데…… 철류흔의 맨 마지막 기억은 자못 씁쓸했다.

소유자가 이승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 인사불성의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시계가 온통 새까맣다.

신검은 우선 눈부터 뜨려 했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아마도 식물인간이 되어 병상에 오래 누워 있은 탓이리라.

도대체 이 꼴로 얼마나 많은 날을 보낸 건지 알 수 없지만, 몸에 기력이 현저히 부족했다.

불현듯.

신검은 하단전의 기해혈에 내공이 상당량 쌓여 있는 걸 감지했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철류흔은 분명히 운기조식(運氣調息)을 할 수 없었을 텐데, 어째서 기가 쌓여 있는 건지…….

의식 없이 축기는 불가능하다.

당연한 이치였다.

먼저 정신이 깨어 있지 않으면 육신이 아무리 멀쩡하다고 한들 무용지물인 것을.

‘환생의 영향인가? 일단 내가기공(內家氣功)의 묘용으로 몸 상태를 호전시켜 보자.’

신검은 즉시 운기행공(運氣行功)에 돌입했다.

절명한 소유자의 사문인 백악검문의 내공 심법 구결대로.

후우, 스읍, 후우, 스읍……

숨기를 고르며 운기행공을 시작하자 지금껏 굳어 있던 하단전이 조금씩 꿈틀댄다.

본연의 진기가 태동하며 기혈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오랜 병상 생활로 자연히 막혀 버린 기경팔맥(奇經八脈)과 십이정경(十二正經)도 시원스럽게 터졌다.

그때 다시 을사적의 말이 귀에 와 닿았다.

“대사형, 오늘도 제가 특별한 약을 준비해 왔습니다.”

염낭에 손을 넣은 그가 곧 자그마한 환약 한 개를 꺼냈다.

“여느 때처럼 이 독환(毒丸)을 복용하고 죽은 듯 누워 깊은 잠에 빠져 계십시오. 적당한 시기가 되면 저승으로 보내 드리지요. 본 문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잘 관리해 나갈 테니…….”

그렇게 독환을 철류흔의 입술 쪽으로 가져간 순간.

덥석!

웬 손 하나가 그의 팔목을 세게 움켰다.

“동작 그만.”

내실을 나지막이 울리는 음성.

을사적의 얼굴 위로 불신의 빛이 번졌다.

눈을 떴다.

철류흔이.

봄,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될 때까지 육 개월간 반송장이나 다름없던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이다.

“대…… 대사형……?”

철류흔은 상대의 팔목을 붙잡은 채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조용히 마주치는 시선.

철류흔이 무심한 표정으로 이르기를.

“너냐? 멀쩡하던 몸을 이 꼴로 만든 놈이?”

경악한 을사적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찰나 철류흔의 안광이 싸늘하게 굳고.

“눈을 뜨자마자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생겼군.”

을사적은 당혹스러운 중에 제 팔을 세게 흔들어 철류흔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확!

하지만.

‘웃!’

마치 올가미 같은 손아귀.

식물인간으로 지내다가 막 정신을 차린 자의 악력이 뭐 이렇게 센 걸까.

뻑―!

둔탁한 음향과 함께 을사적이 비명을 내질렀다.

“컥!”

우당탕―

뒤로 벌러덩 나자빠진 그의 면상이 순식간에 피로 범벅됐다.

기습적인 박치기에 당한 탓이다.

보기 흉하게 비틀려 버린 코뼈, 그리고 쉴 새 없이 줄줄 흐르는 코피…….

화가 치민 을사적은 즉각 자신의 허리 옆쪽을 더듬었다.

본능적인 반응.

그렇지만 아무것도 없다.

‘아차!’

흥분한 탓에 그만 깜빡했다.

평소 분신처럼 가지고 다니던 애병을 밖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팍!

침상을 박차고 도약한 철류흔이 신쾌하게 접근해 발을 내뻗었다.

빠각―!

때린 곳을 또 때린다.

“아악!”

재차 비명을 토한 을사적이 부러진 코를 싸쥐자마자.

퍽!

이번엔 철류흔의 왼쪽 발이 상대의 옆통수를 강타했다.

뇌를 흔드는 충격.

을사적은 어지럼증을 못 이겨 옆으로 털썩! 쓰러져 누웠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빡― 빠박―!

철류흔의 연속된 발길질에 을사적의 머리가 좌우로 홱홱 꺾였다.

‘컥……! 시신처럼 누워 지내던 놈이 뭐 이렇게 빨…….’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지.”

철류흔의 말과 동시에 터져 나오는 둔탁한 음향.

퍽!

이번엔 복부다.

을사적은 숨통이 턱 막혔다.

‘꺼허어……!’

안 그래도 코뼈가 부러진 영향으로 숨쉬기가 어려운데, 아랫배까지 처맞으니 죽을 맛이다.

퍽, 퍽, 퍽―!

가슴, 배, 옆구리를 연속으로 강타하는 발.

을사적은 지독한 통증에 의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역한 향을 풍기는 핏물이 연신 목젖을 자극하며 불쾌감을 돋운다.

‘끅…… 제기랄! 놈이…… 내공을 운용 중이구나!’

처음부터 너무 무방비였다.

철류흔의 몸 상태가 하루아침에 좋아질 줄은 미처 몰랐다.

불시에 의식을 되찾은 것도 모자라 내공마저 운용하다니…… 앞서 진맥해 보았을 때는 분명히 아무런 징조가 없었는데.

퍽!

재차 오장육부를 엄습하는 묵직한 충격.

‘꺼…… 꺽……!’

순간 철류흔의 오른쪽 다리가 높이 들렸다가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빡― 뚜뚝!

내력이 실린 발뒤꿈치에 의해 을사적의 좌측 늑골 두어 대가 부러져 나가는 소리였다.

“으, 으아…… 으아악!”

당장 호흡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인데, 고통스러운 비명은 잘도 터져 나온다.

철류흔이 그 가슴팍을 지그시 밟아 눌렀다.

“저승에 간 사공운이 통탄할 일이군. 그간 너 같은 놈을 제자랍시고 정성스레 가르쳤으니.”

만신창이가 된 을사적은 괴로운 와중에 의문을 품었다.

‘끄…… 흐윽…… 뭐지? 저 말투는…….’

생경했다.

스승의 성명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 혹 정신을 차리며 인격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철류흔은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의 가슴팍에 얹혀 있던 발을 뗐다.

슥.

그런 다음 옆쪽 바닥에 떨어진 독환을 주웠다.

“증거는 확보했고.”

고개를 돌린 그가 이내 장식장 쪽으로 다가서더니 뭔가를 들어 올리는데.

덥석!

어른 머리통만 한 조각상, 바로 화강암을 깎아 만든 두꺼비다.

그것을 본 을사적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서, 설마…….’

이내 묵직한 두꺼비 상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온 철류흔이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사공운의 죽음도 네놈과 관련이 있나?”

“끄…… 대, 대사형…… 뭔가 오해를…… 일단…… 고정…… 하십시오. 끄끅…….”

별안간 회랑을 다급하게 지나치는 발소리가 들렸다.

타타타탁, 타타타탁―

아마도 처소 밖을 지키고 있던 문도들이 예의 소란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벌컥!

내실의 격자문이 좌우로 벌어지며 백악검문 고유 복색의 이십 대 청년 둘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짧은 경악성.

“헉! 아니?”

“소, 소문주님!”

신검은 그 둘을 보며 새삼 실감했다.

과거 일류 무문으로 명성을 떨치다가 몰락해 버린 백악검문의 소문주 철류흔으로 환생한 이 거짓말 같은 현실을.

“후, 백악검문 소문주라…….”

읊조리듯 중얼거린 철류흔이 스치는 미소와 함께 두꺼비 상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꾸꿍― 우두둑―!

그대로 박살 난 정강이뼈.

을사적의 날카로운 통성이 경내에 메아리친다.

“끄아아아아아악!”

하나 철류흔은 무심한 얼굴로 두 문도에게 명했다.

“저거 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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