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뭘 하러 가신다고요?
백악검문 내의 한 전각.
새하얀 바탕에 큰 산악을 간결한 선으로 형상화한 문양이 수 놓인 무복 차림의 중년 사내가 반색하며 외쳤다.
“정말이냐!”
“예, 총감님. 저도 막상 보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총감이라 불린 중년 사내는 젊은 문도의 말을 듣고 입가에 엷은 웃음기를 머금었다.
“참으로 다행이구나. 소문주님이 드디어 깨어나시다니…….”
무려 여섯 달 만에 접하는 희소식이 아닌가.
그때 젊은 문도가 안색을 바꾸고 을사적과 관련한 일을 마저 보고하더니 독환을 책상 위에 놓았다.
직후 중년 사내의 두 눈이 매섭게 빛났다.
“이것이 그 증거란 말이지?”
“맞습니다. 일단 을 공자는 응급조치를 한 다음 마혈을 짚어 빈 창고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공자는 무슨, 변절자 따위가. 큼, 괘씸한…….”
“소문주님께선 금일 내로 그의 처분을 명확히 결정할 거라 명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중년 사내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일렀다.
“처소도 뒤져 보거라. 또 다른 것이 나올 수도 있으니…… 나는 서둘러 소문주님을 뵙고 오마.”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중년 사내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전각 밖을 나섰다.
* * *
일백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백악검문은 호남성 내 굴지의 정파 명문이었다.
그렇지만 삼십 년 전부터 퇴보를 거듭하다가 결국 유명무실한 무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작금에 남아 있는 유산이라곤 그저 빛바랜 영광뿐.
그래도 당대 문주 사공운은 절망하지 않고 사문을 부흥시키고자 무공 연마에 부단히 애를 썼다.
그 결과 마흔 줄에 이르러 지역 내 유명 검수들 중 한 명으로 올라섰고, 또 백문검군자란 별호도 얻었다.
문도들에게 있어서 그는 어둠 속의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긴 침체기를 겪는 와중에 모처럼 배출된 인재였으니까.
하지만.
어느 날 명상 수행을 위해 홀로 길을 나섰다가 의문의 흉수와 맞닥뜨려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게 백악검문은 좌절의 늪에 빠졌다.
설상가상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공운의 무학을 계승 중이던 첫째 적전제자 철류흔마저 갑자기 식물인간이 됐다.
‘한데…… 그 육신을 빌려 내 영혼이 부활할 줄은 몰랐지.’
졸지에 소문주 철류흔이 된 신검은 내실 한쪽의 명경에 비친 제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꽤 훤칠한 신장에 그림처럼 번듯한 이목구비…… 암만 봐도 신기한 상황이다.
믿을 수 없는 환생의 기적.
앞서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된 기억으로 말미암아 현실을 빨리 깨닫긴 했지만, 흉중에 맴도는 의문은 풀 길이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한 걸까.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천지신명께 간절히 빌어 본 적도 없는데…….
일단 현 상황을 직시하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육신의 본래 주인이 가지고 있던 감각, 경험, 기억 등이 모조리 각인된 상태였기에.
게다가 자신은 일천 년간 여러 절대자의 손을 거치며 인간의 삶이란 걸 간접적으로 겪었잖은가.
인제 와서 사리 분별 못 하고 우왕좌왕한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었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처음 사용하게 된 사람의 몸인데, 이 모든 것이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워 기분이 묘했다.
기존의 머릿속에 있던 게 고스란히 자신한테 옮겨 왔다지만, 어느 정도는 이질감이 들 법도 하잖은가.
‘신기하군. 마치 내가 예전에 사람이었던 것처럼…….’
아무튼 적응은 끝났다.
지금은 그저 냉철하게 생각을 정리할 때다.
철류흔은 곧 침상에 턱을 괴고 앉아 환생하기 전의 마지막 일을 되짚어 보았다.
당시 사공운은 자연을 벗 삼아 좌선하고자 인근 계곡을 찾았다가 웬 낭인한테 허무히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고작 몇 합 만에 승패가 갈렸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감춘 놈이었지. 하지만 사공운은 그렇다고 쳐도 나까지 파괴하다니…….’
모든 의문의 시작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실지 사공운은 십여 년 전 신검인 자신을 우연히 입수했으나 역대 최고, 최강의 전설적인 신병이기(神兵利器)란 사실은 까맣게 몰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신검에 잠재된 신기를 깨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일신의 공부가 지고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낭인의 압도적인 무위에 비해 성취가 부족하여 죽임을 당한 건 십분 납득이 갔다.
한데.
소유자의 무위와 별개로 자신마저 깨져 버린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온갖 병기를 상대해 왔다.
마검(魔劍), 영검(靈劍), 요검(妖劍) 등의 신병이기와 맞부딪친 적도 부지기수였다.
그렇지만 균열이나 흠집 따위가 생긴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신검이던 자신의 내구성은 그 어떤 신병이기보다 견고했고, 또 자신의 신기는 세상의 모든 힘을 압도했으니까.
파괴와 소멸을 동시에 경험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불가해한 일이다.’
설마 자신을 능가하는 신검이 존재할 리는 만무한데…….
여하간 낭인의 가공스러운 무력 때문에 깨진 건지, 그 검이 특별해 그런 건지 불분명한 상황이다.
‘혹은 둘 다일 수도 있고.’
그것은 또 하나의 의문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신검이라더니 별것 아니구나.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아직도 놈의 음성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았다.
당대에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실체를 낭인은 어떻게 미리 파악하고 온 걸까.
어쨌든 큰 의문을 떠나서 환생을 통해 패배를 설욕할 기회는 생긴 셈이었다.
신검이 아닌 인간으로서 생의 목표는 간단히 정리됐다.
‘놈을 반드시 찾아 복수한다!’
그렇다, 죽은 사공운을 위함이 아닌 오롯이 나의 복수다.
그 외 다른 건 관심 밖이었다.
인간의 생애는 이미 일천 년간 지겹도록 봐 왔다.
칼이 아닌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그 삶이 새로울 것도, 궁금할 것도 없었다.
그저 천하 만병의 지존으로 군림하던 자신의 짓밟힌 자부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전부였다.
굴욕의 빚을 어떻게든 갚지 않으면 이 새로운 생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란 생각과 함께…….
뭐, 당장은 정체나 행적을 유추할 만한 단서가 전무하지만.
낭인의 외형은 흔히 볼 수 있는 떠돌이 검수였다.
허름한 회색 피풍 차림에 얼굴이 안 보일 정도로 꾹 눌러쓴 죽립, 그리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넉 자 길이의 검.
재차 그 모습을 떠올려 봐도 인상적인 부분은 사공운을 가지고 논 것도 모자라 신검인 자기마저 쉽게 아스러뜨린 절륜한 무력, 오직 그뿐이었다.
‘그때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곱씹는 것은 여기까지.
자꾸 떠올려 봐야 괜한 심력만 소진할 따름이다.
철류흔으로 살게 된 이상 복수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일신의 무를 빠르게 강화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어차피 낭인을 찾는 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테지만, 무위 상승 과정만큼은 그래선 안 된다.
원래 철류흔의 자질은 천재, 기재와 거리가 멀었다.
다시 말해 재능의 부족함을 노력으로 메우는 부류였다.
그렇듯 정석적인 수련 방법만 가지고 어느 세월에 강자가 될 것이며, 또 어느 세월에 앙갚음을 할 수 있겠나.
‘차후 놈을 찾자마자 바로 행동할 수 있도록 단시간에 최고수로 올라서야 한다.’
만약 그러지 못하면 환생 자체가 무의미한 것을.
생의 목표와 더불어 무의 목표도 설정했다.
천마, 검제, 사황, 무선, 혈신.
과거의 소유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과 영적으로 소통까지 한 바 있는 무림 역사상 최강 반열의 오인(五人).
낭인의 정확한 무위를 알 길이 없으니, 적어도 그 다섯 명에 비견될 정도의 무력은 되어야 어떻게 해볼 만할 것이다.
신검이 웃었다.
아니.
철류흔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묘안은 얼마든지 있지.’
그렇다, 다음 수도 벌써 계산된 상태다.
실지 육신의 자질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
철류흔은 더 이상 예전의 철류흔이 아니므로.
비록 그릇은 같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이 바뀌었다.
신검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학적 지식은 당대 최고 수준, 나아가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각 시대의 최고수와 일생을 함께 보내며 자연스레 숙지하게 된 절세 무공 구결들, 셀 수 없이 많은 실전 경험들, 또 무도 극상의 경지에 이르는 수련 방법들, 그 모든 게 머릿속에 들어 있으니까.
심지어 각종 기연이 비밀스럽게 안배된 장소도 훤히 꿰뚫고 있으니 무위 상승의 첫 물꼬만 제대로 트면 될 일이다.
궁극적으론 놈의 칼을 부수고 머리통을 자를 수 있을 만큼 세져야 한다.
그것이 완벽한 복수다.
돌연 철류흔의 두 눈에 강렬한 빛이 감돌았다.
‘그곳으로 가서 육신부터 개조하자!’
계획은 세웠다.
남은 건 이제 실행뿐.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급히 달려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탁, 탁, 탁, 탁……!
철류흔이 그 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돌린 순간 격자문이 벌컥! 열리며 한 중년 사내가 발을 들였다.
“소문주님!”
대인배의 기품이 서린 듯한 인상의 그는 현 백악검문의 총감 협무극이었다.
올해 나이 서른여덟 살, 별호는 백섬검호(白閃劍虎).
문중을 대표하는 중견 검수이자 문주 사공운이 생전에 거의 가족처럼 신뢰하던 복심이 바로 그였다.
또한 철류흔을 평소 제 자식처럼 여기며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은 자이기도 했다.
당장 자신에게 가장 믿을 만한 수하 한 명을 꼽으라 하면 단연 협 총감일 것이다.
“소문주님! 이것이 정녕 꿈은 아니겠지요?”
반색한 협무극의 외침에 철류흔은 별 감흥 없이 대꾸했다.
“꿈은 무슨.”
그러자 협무극이 냉큼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혹 다른 이상한 증상은…….”
“괜찮아. 눈뜨자마자 심기가 좀 불편해진 것만 빼면.”
앞서 을사적과 관련한 일을 뜻하는 말이다.
일순 협무극의 안광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으음…… 안 그래도 방금 보고를 받았습니다. 저는 여태껏 문주님의 서거 때문에 심적인 충격이 커서 그렇게 되신 줄로 알았습니다.”
“을가 놈은 창고에 가뒀나?”
“예. 이따가 제가 직접 그를 심문해 보겠습니다.”
“그냥 놔둬.”
“예?”
“내가 다시 놈의 뼈를 한 개씩 분질러 볼 참이니까. 정 괴로우면 알아서 모든 걸 불겠지.”
그 말을 들은 협무극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왠지 소문주님의 태도가…….’
원래 철류흔의 성품은 스승인 사공운을 닮아 평소 거친 언행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을사적을 그 꼴로 만들어 버린 것부터 그랬다.
물론 예의 상황에서 격노하지 않을 자가 몇이나 되겠냐만, 그래도 손속이 너무 과격했다.
철류흔이 그 의중을 간파하고 말하기를.
“낯설게 느끼는 건 당연해.”
정곡을 찔린 협무극이 민망한 기색을 보였다.
“이런…… 티가 많이 났습니까?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는 없고.”
“아…… 예.”
“오늘 일을 계기로 난 더 이상 예전처럼 살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니 협 총감도 빨리 적응해.”
식물인간이 되기 전의 품행은 잊어라, 그런 의미다.
협무극이 진중한 표정으로 고갯짓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소문주님. 한데 자못 궁금한 것이…… 대체 어떻게 운기행공이 가능하셨습니까?”
“운이 좋았지. 무의식중에 축기가 된 상태였어.”
철류흔은 대충 얼버무렸다.
환생의 영향 같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미치광이 취급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허, 그런…….”
“여하간 그 내공 덕분에 근맥을 일시적으로 강화해 을가 놈을 족쳤던 거지.”
“예? 그 방법은 또 언제 터득하신 겁니까?”
“예전에 사부님께 배웠다. 일종의 극비 수업이었지.”
“…….”
본인이 그렇다고 말하니 협무극은 토를 달기가 힘들었다.
한편 철류흔은 속으로 웃었다.
내가기공을 바탕으로 근맥을 강화하는 요체는 실지 사공운이 아니라 이미 까마득한 옛날에 첫 소유자를 통해서 배운 것이니까.
“소문주님, 일단 문중의 기강을 새로 확립할 겸 취임식을 조속히 거행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제가 며칠 내로 준비하지요.”
“아니,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무엇입니까?”
“문주 직은 일신의 자질을 증명해 보인 다음에 맡겠다. 최소한 사부님에 버금가는 수준은 되어야 다들 진심으로 따를 테니까.”
“하오나 그러기엔 시일이…….”
“오래 안 걸려.”
“예?”
“열흘이면 충분해.”
“…….”
협무극의 두 눈 속에 소문주를 향한 근심의 빛이 가득했다.
열흘? 아니, 그게 말이 되나? 설마 독환의 후유증인가?
정작 철류흔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만 계속할 따름이다.
“그래서 난 모처로 가서 탈태환골(奪胎換骨)부터 할 계획이다.”
동시에 협무극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뭘…… 하러 가신다고요?”
“탈태환골.”
“…….”
전신의 피부를 모조리 벗겨 내고 골격을 완전히 새롭게 짜 맞추는 최상승의 깨달음, 그것이 바로 탈태환골인데…….
이거 야단났다.
보통 큰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소문주님이 지금 정상이 아니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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